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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수용효 작성일24-12-09 00:02 조회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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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바람이, 길과 운동화 사이 박음질을 푼다. 여름내 꿰매놓았던 것들이다. 올이 풀리자 몸이 날아갈 듯하다. 중랑천 왜가리들처럼 보폭을 넓혀 달려본다. 기록을 낼 수도 있겠는데? 앞선 러너를 추월하는 기분이 짜릿하다. 6분대였던 1㎞ 기록이 5분대가 되고, 기어이 4분대가 된다. 이미 그림자는 저 멀리서 허둥댄다. 호흡할 때마다 공기가 기관지를 따라 허파로 가지 않고, 방향을 틀어 허풍이 된다. 순간, 누가 종아리를 찢어놓는 기분이 든다. 절뚝대며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쫓아온 그림자가 쯧쯧 혀를 찬다.
달리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 휴식
안티푸라민 노동부 퇴직금 계산기 을 잔뜩 바르고 하루를 보낸다. 좀 나은 듯도 하다. 거리엔 나무의 손을 놓아버린 나뭇잎들이 먼저 달린다. 내일 새벽엔 어디까지 가 있을까. 억지로 달려야 할 이유를 만들며 아픔을 지워버린다. 다음날, 조심스럽게 첫발을 떼어본다. 괜찮다. 걸을 때는 아팠는데 이상하게도 달리다보면 통증이 사라진다. 달리면 낫는 거구나, 혼자 진단하고 다시 속도를 올려본다. 5년이내 그림자가 허리춤을 잡아당긴다. 뿌리친다. 어쩌면 나에게 러너의 피가 흐르고 있었을지 몰라, 이번에는 과신이 마구 등을 민다. 시계를 보니 1㎞, 3분50초의 속도를 표시한다. 놀라운 아마추어 러너의 탄생, 과신이 망상으로 머리를 스쳐 가는 순간, 헉, 아예 발을 바닥에 디딜 수도 없게 됐다.
“평생 달리기를 못하게 될지 몰라.” 의사 선생 중학교 급식비 님이 초음파 화면 한 곳을 짚으면서 겁을 준다. “여기 봐봐, 근육이 찢어진 거 보이죠? 선수예요? 뭐 하러 이렇게 되도록 달려.” 비극은 왜 나에게만 올까. 다른 말은 귓전을 벗어나고, 오직 달리기를 못하게 될까 조급하다. 처절하게, “선생님 제발 고쳐주세요” 한다. 의사 선생님이 가리킨 벽에는 의사자격증 옆에 태릉선수촌 주치의 증서가 빛바랜 채 걸려 있 상호저축은행금리비교 다. “내가 전공이 종아리야. 내 말대로만 하면 다 나아.” 몸살 때문에 왔다가 절뚝거린 덕분에 비극을 희극으로 표현할 줄 아는 명의를 만난 것일까.
부상을 입고 나서야 동네 병원 전문가가 된다. 종아리 때문에 찾은 병원에서 신경치료주사를 맞고 목디스크를 기적같이 완치한다. 어르신이 많은 한의원에서는 친절함에 감동하며 침을 맞은 채 코를 군미필무직자대출 곤다. 뼈암이 의심된다고 어마어마한 자기공명영상(MRI) 촬영비를 들인 적도 있고, 값비싼 신발 깔창을 깔고 물리치료만으로 한 달을 보낸 병원도 있다. 부상은 그래도 적절한 휴식을 집으로 초대한다. 휴식 때문에 기량이 떨어질까, 걱정이 한숨을 내쉬면 휴식이 다독인다. “쉬면 더 잘 달리게 될 거야.” 그래도 걱정은 휴식을 두고 나가 달린다. 그렇게 또 아프고, 종아리 보호대를 종류별로 사고, 걷기만 반복하다가 그제야 휴식이 달리기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가정의학과 선생님은 의외로 2주가 지나 살살 달려보라 한다. 때를 아신다. 달리기든 휴식이든 뭐든 그만둘지 하던 참이었다. 이럴 수가, 아프지 않다. 이럴 수가, 수가, 하면서 5㎞를 달린다. 주사 두 번과 휴식이 과신을 털어낸다. 이제는 추월해 가는 러너에게 박수를 보내고, 달리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속도를 줄이거나 멈춘다. 아픈 곳을 살피고 돌아설 줄도 알 만큼 부상, 휴식과 친해졌다. 지루했지만 새로 태어난 듯한 6개월의 여정이었다.
워싱턴디시, 미국 넘어 세계사의 현장
워싱턴디시(DC)는 전쟁에서 입은 국가의 부상을 기념비로 치료하고 추모하고 애도하면서 다시 힘을 기르는 미국의 상징 같은 도시였다. 늘 동경만 하다가 순방을 기회로 드디어 포토맥강을 볼 수 있게 된다. 첫 순방이기도 했지만, 워싱턴디시의 모든 것이 가슴 뛰게 한다. 호텔 앞 큰길에서 국회의사당, 워싱턴 모뉴먼트가 보인다. 미국을 넘어 세계사의 현장이다. 마치 내가 그 한 페이지에 뛰어든 기분이다. 과거 유럽에서는 로마, 동양에서는 베이징에 입성한 선조들의 심정이 그러했으리라. 백악관이 길가에 저토록 덤덤하게 서 있는 것도 낯설다. 묘한 자신감에 놀란다.
2017년 6월 워싱턴디시가 문재인 정부 첫 순방지로 결정된 것은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북한과는 비핵화와 평화를 논의해야 하고, 중국과는 북한 핵 문제뿐 아니라 사드 배치로 어려워진 경제협력을 되살려야 할 과제가 있었다. 미국과 손발을 맞춰야 균형 맞는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굳건한 한-미 동맹을 확인하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일이다. 일의 성사 여부가 달린, 중요한 전제다.
전쟁의 ‘부상', 추모와 애도로 ‘치유'
문재인 대통령이 한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서의 연설이 미국인의 마음을 연다. 북핵 문제 해결에 미국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관심을 끌어들인 건 성과다. 동맹이라면 동등하게 서로의 이익을 나눠야 한다. 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과의 경제협력은 필수다. 경제동맹에도 합의한다. 여기에 더해 참모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기업가적 기질에 기대한다. 지금까지 미국이 뒷전에 두었던 한반도 문제가 전면에 등장할 수 있다. 두 정상의 깊은 우정이 필요하다. 영빈관 방명록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해 한국을 방문해 우정을 확인한다. 어느 정도는 맞았고, 어느 정도는 가로막혔지만, 한반도 문제 해법에 트럼프 대통령을 내세운 일은 창의적 방안이었음이 틀림없다.
이튿날 어둠이 가시기 전에 운동화 끈을 맨다. 목표는 링컨기념관을 거쳐 알링턴 국립묘지까지, 대략 왕복 8㎞ 거리다. 워싱턴 모뉴먼트에서 링컨기념관으로 가는 동안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반사의 연못)에 해가 뜬다. 호수를 둘러싼 ‘제2차 세계대전 국립기념비’ ‘베트남전쟁 참전용사 기념비’가 죽음을 격려한다. 죽음이 애국으로 승화한다. 미국을 위한 미국의 죽음, 초강대국이 세운 죽음의 기념비는 많고도 높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앞에 선다. 머뭇댄다. 낯선 땅, 한반도의 겨울을 정찰하는 19명의 용사상이 살아 있는 것 같다. 고마움, 감격, 피가 나오도록 튼 손, 잔업과 철야, 독재와 민주화, 갖은 생각들이 스쳐 지난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첫 매장자는 남북전쟁 사망자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무덤을 보고 싶었지만 들어갈 수 없다. 이곳의 무명용사 묘역은 미합중국 육군 제3보병연대 올드가드가 지킨다. 어떤 상황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는 그들도 역시 마음에만 담는다.
돌아오는 길에서 마틴 루서 킹의 동상을 만난다. 전쟁의 역사에 인권의 역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본다. 미국이 나라 밖, 안에서 입은 만만치 않은 부상들은 자유와 개척의, 미국 정신을 믿고 행동한 이들에 의해 치유됐을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마크 트웨인, 찰리 채플린, 헨리 포드, 월트 디즈니 등등 자기 방식으로 미국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미국을 기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그 사이에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좋아하는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를 포함시키고 싶었다.
방향 점검, 목표 세워 새출발
고백하자면, 미국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1985년 5월, 서울대학교 삼민투위원장 함운경을 위시한 대학생 73명이 서울미국문화원을 점거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가슴이 뛰었다. 고향 강원도 춘천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세탁소를 하든, 식당을 하든, 내로라하는 부자가 많았다. 중학교 입학 무렵엔 모두 이민을 갔다. 간혹 교실에는 ‘튀기’라 불렀던 혼혈 친구도 있었다. 노란색 연필 한 다스, 충격적인 잡지들이 동경을 일으켰다. 거대한 헬리콥터와 시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탱크들, 미국은 수호자였다. 그런 미국 앞에 청년들은 대등하게 맞섰다. 무모했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한번 해야 할 일이었다. 어른들은 겁먹었다. 장하다, 해야 할 그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가뒀다. 자유를 가져온 미국이 자유를 속박할 리 없다. 민주주의를 가져온 미국이 민주주의를 헤칠 리 없다. 자유와 민주주의로 성장한 청년들이 미국에 당당하게 물었다. “광주학살을 알고도 왜 묵인했는가?”
가을이다. 여름내 먹고살기 바빠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것도 몰랐다. 통증이 심한데도 참고 달렸더니 허리를 펴기도 힘들다. 휴식 없는 전진이 눈까지 침침하게 만들어 이정표를 지나친다. 달리기를 좋아할수록 그 크기만큼 부상은 온다. 애국의 방법이 다를 뿐, 나라를 아끼는 과정에서 개인은 다양한 부상을 입기 마련이다. 어느 분야에서는 과신으로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를 추월하느라 모두 애썼다.
이제 잠시 앉을 때가 되었다. 찬찬히 부상을 치료하고 장비를 점검해야 한다. 몰락한 독립군 후손이 정당한 기회를 갖도록 돕는다면, 그게 친일 청산이다. 명예란 그 주인공이 살아 있을 때에야 의미를 갖는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소외되고, 민주화의 그늘에서 희생한 분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존중받아 마땅하다. 무엇보다 달리기의 목표를 다시 세워야 한다. 신분 상승의 방향은 권력이 아니라 도덕성으로, 잘 사는 것의 방향은 양극화가 아니라 함께 잘 사는 것으로. 그것이 우리를 지탱할 한국 정신이다. 그것이 있어야 우리가 입었던 부상들이 튼튼한 근육과 경험으로 새로 돋아날 것이다. 지속 가능, 장거리 달리기가 가능한 나라가 강한 나라다.
가을이 되면 바람이, 서로를 모이게 한다. 여름내 뿔뿔이, 살도 맞대기 싫어하던 사람들이다. 모이니까 비로소 상대방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보게 된다. 옛사람들이 ‘눈부처’라 했던 것, 상대가 없으면 볼 수 없는 내 모습이다. 잠시라도 쉬어 가자. 쉬면서 둘러보자. 휴식이야말로 진정한 출발이다, 가장 행복한 달리기다.
글·사진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새벽의 링컨기념관.





새벽의 워싱턴 모뉴먼트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을 지키고 있는 그랜트 장군상.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제18대 미국 대통령.





워싱턴DC를 달리다가 우연히 마주친 마틴 루서 킹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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