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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의 쇼군(장군)’으로 불리며 일본 정계에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해온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 대표 겸 주필이 별세했다.
그는 요미우리신문의 ‘1000만부 시대’를 열었고 한일 국교 정상화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죽는 날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세계 최다 발행 부수 신문사를 이끌었다.
19일 요미우리신문은 와타나베 대표가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향년 98세다. 지난달 말까지도 정기적으로 출근해 대출신용불량 요미우리 신문 논조를 이끌었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사설 원고를 점검했다고 회사 측은 전했다.
1926년 도쿄 출생인 그는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0년 요미우리신문에 입사했다. 초창기 기자 시절과 워싱턴 특파원 시절을 빼고는 줄곧 정치부에서 활약하며 정계에 끈끈한 인맥을 형성했다. 요미우리신문이 지주사 체제로 바뀌면서는 그룹 본사 사업자대출신청 대표이사 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와 특히 가까웠던 인물로는 1950년대 일본 정계 거물이자 자민당을 창설한 인물 중 하나인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가 꼽힌다. 오노 부총재는 일본 종전 직후 재일교포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포함해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오노의 양아들’로 불리며 가까운 주휴수당 계산기 사이였던 와타나베 대표는 그를 설득해 1962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와 김종필 등을 만나게 했다. 이후 한일 국교정상화가 급물살을 타게 됐고 1965년 정식 수교로 이어졌다. 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 간 한일 수교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김종필-오히라 메모’ 등의 특종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통계청역대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아베 신조, 기시다 후미오 등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나카소네 총리의 경우 1959년 함께 정치연구회를 결성한 뒤 그가 입각할 수 있도록 로비하기도 했다. 이후 역대 총리 상당수가 내각 인선 때 그의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1991년 요미우리 사장을 맡으면서는 ‘요미 기등록 우리 1000만부’ 시대를 열었다. 자서전에서 “아사히신문을 넘어 1등 신문이 되겠다”고 밝힌 뒤 1994년에 일본 신문 중 처음으로 1000만부를 돌파한 것이다. 이어 2001년 1월에는 역대 최고 부수인 1031만91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와타나베 대표가 보수 성향 최대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 논조를 중용이라는 현실적 관점에서 자유주의적 보수 노선으로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1995년 경쟁지인 아사히신문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주장하고 나서자 그도 동조하기도 했다. 와타나베 대표는 “공동 개최할 경우 양국 모두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며 지지했고, 결국 현실이 됐다.
보수적인 논조로 요미우리신문을 이끌었던 그는 2006년 일본 정치인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월간지 론자와 뉴욕타임스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직설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은 역사나 철학을 모르면서 공부도 하지 않고 교양도 없기 때문”이라며 “고이즈미는 정치를 해야지 이데올로기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일본의 아시아 외교가 망가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그해 9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매경도쿄포럼’에서도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과 대담하며 이 같은 정치인식을 보여줬다. 당시 그는 일본 보수파 사이에서 우경화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간지 ‘슈칸분슌’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해 1월 발간된 책에서도 A급 전범이 분사되지 않는다면 정치권력자는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6년부터 약 8년 동안 일본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와 대표 등을 맡았고, 일본 국기로 불리는 스모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요코즈나를 심의하는 위원회의 위원장도 지냈다. 이를 통해 스포계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쳐 ‘전후의 괴물’ ‘마지막 괴물’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는 “총리 재임 중에 조언과 따뜻한 격려를 받았다”며 “한 시대가 끝났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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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미우리신문의 ‘1000만부 시대’를 열었고 한일 국교 정상화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죽는 날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세계 최다 발행 부수 신문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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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역대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아베 신조, 기시다 후미오 등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나카소네 총리의 경우 1959년 함께 정치연구회를 결성한 뒤 그가 입각할 수 있도록 로비하기도 했다. 이후 역대 총리 상당수가 내각 인선 때 그의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1991년 요미우리 사장을 맡으면서는 ‘요미 기등록 우리 1000만부’ 시대를 열었다. 자서전에서 “아사히신문을 넘어 1등 신문이 되겠다”고 밝힌 뒤 1994년에 일본 신문 중 처음으로 1000만부를 돌파한 것이다. 이어 2001년 1월에는 역대 최고 부수인 1031만91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와타나베 대표가 보수 성향 최대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 논조를 중용이라는 현실적 관점에서 자유주의적 보수 노선으로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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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은 역사나 철학을 모르면서 공부도 하지 않고 교양도 없기 때문”이라며 “고이즈미는 정치를 해야지 이데올로기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일본의 아시아 외교가 망가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그해 9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매경도쿄포럼’에서도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과 대담하며 이 같은 정치인식을 보여줬다. 당시 그는 일본 보수파 사이에서 우경화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간지 ‘슈칸분슌’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해 1월 발간된 책에서도 A급 전범이 분사되지 않는다면 정치권력자는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6년부터 약 8년 동안 일본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와 대표 등을 맡았고, 일본 국기로 불리는 스모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요코즈나를 심의하는 위원회의 위원장도 지냈다. 이를 통해 스포계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쳐 ‘전후의 괴물’ ‘마지막 괴물’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는 “총리 재임 중에 조언과 따뜻한 격려를 받았다”며 “한 시대가 끝났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