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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팔무전’을 앞두고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이다. 팔순을 한해 앞둔 때인데, 생각하니 팔순도 연분홍 봄날이다. 대구광역시 무형유산 살풀이춤의 인간문화재 권명화, 지난 9월2일 춤으로 종신하였다. 향년 92. 이진환 사진작가 제공
‘9월2일 권명화 선생 타계.’ 컴퓨터 화면에 카카오톡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마지막 예기(藝妓)가 가셨구나. 부고란 그렇다. 잘 달려가던 시간의 급소를 찌른다. 다음날, 경부선 케이티엑스(KTX)에 올랐는데 하필 좌석이 역방향이다. 열차는 앞으로 가는데 나는 뒤로 미끄러진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처럼 시간이 거꾸로 감긴다. 그렇게 30여년을 역주행하니 1998년, 배롱나무꽃 붉던 여름, 대구 신암동 ‘권명화 민속무용연구원’이다.
선생이 장구를 치며 제자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었다. 장구채를 ‘처얼썩’ 눌렀다가 떼는데, 그 짧은 틈에 한평생의 내공이 들었다. 갱엿이 이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듯 “쩌억쩍” 소리가 났다. 거기에 “나니나 나르딧…” 춤을 부추기는 구음이 구성지게 얹혔다. 목석이라도 벌떡 일어나 팔 한번 벌리고 싶을 판이었다. 그러나 몇장단 못 가, 변죽을 딱! 치더니 제자를 닦달했다. “그 속에 뭐가 있단 말이다. 그걸 찾아야 된단 말이다.” 한 장단도 그냥 보내지 말고 되새김질을 하란 것이다. 옛 춤의 모양새가 그렇듯 보폭은 좁고 동작은 돗자리 하나를 넘지 않았다. 나는 서울에서 한판 꾸미니 올라오시라 했다. 찬찬히 나를 살피더니 “내 춤은 멋이 없는데, 우세 안 할까” 했다. 겸양 같지만 말속에는 뼈 같은 자존이 있었다.
1998년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중에 열린 ‘명무초청공연’. 권명화는 희다 못해 푸른 살풀이 수건을 들고, 칠흑 같은 어둠에 새하얀 길을 내며 춤을 추었다. 축제에 온 수잔 링케, 아리안 므누슈킨 등 세계적인 예술인의 극찬을 받았다. 박상윤 사진작가 제공
그해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는 필립 드쿠플레, 테시가와 사브로, 수잔 링케 같은 세계적인 무용가들이 왔다. 그런데 정작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명무초청공연’에 모신 김수악, 장금도, 권명화 세 예기의 춤이었다. 서양 현대무용의 첨단을 들고 온 사람들이 돗자리 한장 안에서 추는 늙은 여인들의 춤에 옴짝달싹 못 하고 붙잡혔다. 수잔 링케는 자원봉사하던 무용과 학생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굿거리장단의 호흡을 배웠다. 프랑스 태양극단의 아리안 므누슈킨은 그 춤을 보고 “육체는 날아가고 영혼만 남아서 추는 춤”이라 했다고 이종호 예술감독이 전해주었다.
다시금 춤판에 예기란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예기는 일제강。기 일본의 제도와 용어의 영향을 받아 널리 쓰인 말이다. 본디 기생이라 하면 노래와 춤과 악기가 따라왔다. 유생에 사서삼경이, 서생에 책과 붓이 따라오듯 그랬다. 그러나 기생이라는 이름에서 예인의 뜻이 흐려지자 다시 ‘예’를 앞세워 불러야 했다. 예를 붙여 예인이 된 것이 아니다. 본디 예인이었는데 그 뜻이 흐려졌기에 다시 예를 붙인 것이다. 기생이라는 이름에서 희미해진 악·가·무를 ‘예’ 한 글자가 다시 불러 세운 셈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그 말에 무심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채 맞은 생짜’라 했다. ‘채’는 회초리이고 ‘생짜’는 기생이다. 소리 하나, 춤사위 하나를 채 맞아가며 제대로 익힌 기생이라는 뜻이다. 기생이라고 모두 각고의 학습을 마치고 판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얼굴만 믿고 술상에 앉은 ‘화초기생’도 있었고, 예술 없이 나무토막처럼 앉아 술만 따르는 ‘나무기생’도 있었다. 반면 ‘채 맞은 생짜’는 제대로 격식을 다 배웠다는 자부에 찬 말이었다. 한량들 또한 예술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그 말을 썼으니, 그들끼리의 존칭이었다. 그 마지막 ‘채 맞은 생짜’가 이승의 판을 내려간 것이다.
풍경을 뒤로 밀어내던 열차가 김천역에 멎는다. 권명화는 1934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경북 안동의 무가(巫家)에서 자랐고, 문경 일대에서 굿을 하던 모친을 만나 직지사 아래로 옮겨와 농사를 지으며 굿을 했다. 밤이면 어린 명화는 동생을 업고 젖을 먹이러 어머니가 있는 굿판을 찾아갔다. 기다리는 동안 장단이며 사설이며 온갖 소리가 귓불로 스몄다. 춤보다 먼저 장단이 몸에 들었다. 밤이면 마을을 지나는 경부선 열차도 “덜커덩 덜커덩” 철길 이음매를 밟으며 지나갔을 것이다. 굿판에서 밤새 주워 담은 장단도 어린 심장 어디쯤에서 그리 뛰었으리라.
지금 내가 탄 케이티엑스는 덜커덩거릴 새도 없이 김천을 밀어내고 대구를 향해 낙동강을 건넌다. 권명화가 이 강을 건넌 것은 열여섯 무렵이었다. 6·25가 터지고 낙동강 전투가 지나간 뒤, 부친은 그나마 수비가 든든한 대구로 피란을 택했다. 하필 닿은 곳이 남산동이었다. 지금의 대구 중구 남산2동 940번지 일대에는 포교당 절집이 있었다. 대구역 근처 양키시장, 지금의 교동시장 부근에 있던 대동권번이 불에 타자 이곳으로 옮겨와 경북국악원으로 이어진 터였다. 피란 와 겨우 얻은 권명화네 집과 그곳 사이에는 담 하나가 있었다.
피란살이 집이 버젓할 리 없었다. 무너진 담장 너머로 날마다 장구가 울고 소리가 터졌다. 그런데 명화의 귀보다 먼저 눈이 넘어갔다. “외씨 같은 버선을 신고 춤을 추는데, 그리 좋데.” 김천에서는 귀로 듣던 장단이었다. 대구에 와서 보니 그 장단에 발이 있고 손끝이 있고 허리가 있었다. 소리가 몸을 얻으니 춤이었다. 날마다 담에 붙어 들여다봤다. 어찌하면 배울 수 있느냐 물었더니 부모 허락 도장을 받아오란다. 아버지에게 도장은 고사하고 몽둥이찜질을 당할 일이었다. 부모가 출타한 어느 오후, 아버지의 돈을 훔쳐 담을 넘었다. 담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돌아보니 살던 쪽과 살아갈 쪽이 갈려 있었다.
이미 춤이 다 외워져 있었다. 예습한 채로 제 발로 들어섰으니, 스승의 눈에 금세 들었다. 훔친 돈이 바닥나 월사금을 내지 못하자 수양딸로 삼아 학습을 잇게 했다. 배운 지 여섯달 만에 대구극장 무용경연대회에 나가 승무를 췄다. 그런데 온 조명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그만 순서를 잊었다. 앉은 채 미동도 않고 다음 춤사위를 생각했다. 객석도 숨을 죽였다. 심사위원들은 더 깊이 봤다. 수행을 상징하는 절묘한 정중동이라 여긴 것이다. 최우수상을 받았다. 춤을 잊어버린 그 짧은 순간까지 춤이 되어버렸다.
그 승무를 가르친 스승이 박지홍(朴枝洪, 1889~1958)이었다. 전남 나주 사람으로 서편소리의 대가 김창환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가 오가는 길목에 살던 고을 이방의 외동딸이 소리꾼에게 연정을 품었다. 당시 이방의 위세라면 소리꾼 하나의 생사쯤 가를 만했다. 두 사람은 대구로 몸을 피했다. 그곳에는 사촌 형이자 동편소리의 대가 박기홍이 있었다. 박지홍은 대구에 뿌리를 내리고 달성권번과 대동권번에서 소리와 춤을 가르쳤다. 심청가와 흥보가에 능했고 시조와 가곡, 북과 장구에도 두루 밝았다. 소리 제자는 여러 명창이 있으나, 춤 제자는 먼저 간 최희선(1929~2010)과 권명화였다.
열차가 동대구역에 닿는다. 30여년을 거꾸로 달리던 시간도 여기서 멎는다. 역에서 20여분 남짓,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아흔둘을 살고 간 선생이 영정사진으로 웃고 있다. 도도하기도 하고 매섭기도 하다. 2013년 ‘팔무전’을 앞두고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이다. 팔순을 한해 앞둔 때인데, 생각하니 팔순도 연분홍 봄날이다. 그때 나는 선생에게 승무를 청했다. 승무는 춤의 무법(舞法)이 모두 들어 있어 법무(法舞)라 부르기도 한다. 춤꾼이 어디서 무엇을 배우고 얼마나 삭였는지 보려면 승무를 보면 된다. 오래된 나무를 베면 세월이 나이테로 드러나듯 승무에는 배우고 익히고 삭여온 연륜이 켜켜이 박혀 있다.
승무는 춤의 무법이 모두 들어 있어 법무라 부르기도 한다. 대구 대동권번의 후신 경북국악원에서 풍류객 박지홍의 승무를 이어받은 권명화는 살풀이춤, 검무, 입춤, 소고춤 등 많은 춤 유산과 제자를 남겼다. 이진환 사진작가 제공
선생은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하였다. 상주가 신씨의 아들 둘과 조씨의 딸로 3남매다. 딸 조은희는 지금 대구광역시 무형유산 살풀이춤 전승교육사로 어머니의 춤을 잇고 있다. 서울에 사는 칠순이 다 된 둘째 아들이 나를 알아보고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공연이 있으면 언제나 공연장에 와서 자리를 지켰었다. “제가 원래 셋째가 될 뻔했어요.” 첫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승무를 추다 유산했단다. 지난 4월 병원에 들어가서도 유튜브를 틀어놓고 “내가 춤꾼”이라 자랑했다 한다. 타계 두시간 전 간호사가 화면 속 선생의 춤을 보여주자 “맞다, 나 맞다”고 했다. 그렇게 춤, 춤, 춤으로 종신한 것이다.
진옥섭 |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巫)’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男舞)’, ‘여무(女舞)’,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렸다. 마침내 ‘무(無)’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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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 ‘사서삼통’, 4일은 서울 3일은 통영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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