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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질병 방역안전청 집고양이 들고양이 접촉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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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동수 작성일19-01-06 04:54 조회1,7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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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생들고양이 ai 바이러스 병원체 번져 확산우려돼어 혹시 변종바이런스 인체 친임및 감염 경계령 주의보 를 환기시켜나가야해, 혹시 집고양이 들고양  접촉을 자재 주위보 발령을 우리 사회에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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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의 의인 욥을 하나님이 사단에게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욥도 육적인 부강과 평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범부(凡夫)에 불과하니 그를 시험해 보도록 충동질 하였습니다. 욥이 처음 시험에서는 하나님의 자랑에 합당할만큼 피조물의 본분에 어긋나지 않았으나 지옥 같은 참담한 고통인 2차 시험 때에는 부지중에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즉 사단의 불 같은 시험 속에서 욥의 심령 속에 한가닥 남은 숨은 죄가 들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욥을 이런 참혹한 시험을 받도록 사단에게 내어준 하나님을 무정하다고 탓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욥과 같은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느냐 이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심령 속에 숨은 티끌만한 죄악도 없기 바라시기 때문에 사단으로 하여금 그러한 죄악도 찾아내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즉 질금거린 똥도 똥이라고 하듯, 죄가 아무리 하찮게 작아보여도 그것을 지니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악취가 진동합니다. 혹독한 시험을 치른 욥에게는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내면에 숨겨진 작은 죄, 곧 질금거린 똥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취 풍기는 죄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으니 욥의 시험과 고난은 세상 만대에 길이 기록되어 의인들의 사표(師表)가 되어야 할 소중한 글(사건)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큽니다, 즉 죄악의 분뇨 구덩이 속을 해메고 다니는 구더기 같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욥이 그 같은 고통 속에서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말로 보이나, 햇빛보다 더 맑고 밝고 또 정금보다 더 순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볼 땐, 그 같은 생각을 털끝만큼이라도 품고 천국 같은 환경에서 살게 되면, 반드시 사단과 같은 불미스러운 점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지극히 작은 죄, 곧 희롱과 농담 같은 우스개 소리라도 거룩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질금거린 똥으로 취급되어 하나님 전에 악취를 풍기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죄를 죄로 취급지 않으려고 하는지… 그것은 사람이 이치를 근거로해 생각지 않고 다만 육신의 생각을 근거로해 살기 때문입니다. 이치는 영의 생각이 전담하고 육적인 평안은 육신의 생각이 전담해 서로 자기 생각대로 사람을 주도하려 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5~7) 하심 같이, 영과 육이 하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의 생각으로 살게 되면 이치를 근거로해 세상 만사를 살피게 되나, 육신의 생각으로 살게 되면 오직 육적 부강과 평안을 기준해 세상 만사를 살피게 됩니다.

 일례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분가하게 되었을 경우, 아들은 아버지로 인해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머리되신 아버지가 평안하여야만 지체된 자신도 편안할 수 있다는 이치를 근거로해 아버지의 평안을 최우선시해 가산을 정리해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만사를 이치를 근거로해 살아가는 영의 생각입니다. 그런 반면에 아들이 자기 육신의 생각을 근거로해 딸린 처와 자식들이 풍성하게 편안하게 살려면,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를 양로원에 가 살도록 합니다. 이럴 땐 자식 앞에 마음 약한 아버지는 다툴 수 없어서 손쉽게 모든 가산을 포기합니다. 이런 자식들은 아들된 분수와 도리를 지키려는 이치를 저버리고 자기 육신의 생각을 근거로해 탐욕의 죄악대로 살게 됩니다.

 머리(아버지)가 평안하여야만 지체(자손)들도 편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치를 근거로한 의로운 생명의 생각이고, 얼마 못가 곧 죽게 될 아버지보다 앞날이 구만리처럼 펼쳐진 자기 자신과 처와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아버지가 조금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양로원에 가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바로 육신의 생각을 위주로한 죽음의 죄악된 생각입니다. 자기 개인의 영달보다 국가의 공익을 우선시하는 공직자는 이치를 근거로한 충성스런 공직을 수행하게 되지만, 자기 한 사람이 공금을 사취한다 하여서 국가 재정이 바닥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부정부패를 마구 저지르는 공직자는 자기 육신의 생각을 근거로한 반역적인 공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나타난 만물은 오직 만든 분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분은 이치에 합당한 말을 하지만, 이 거대한 우주만물은 어떤 분도 감히 만들 수 없고 오직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추정해 말하는 자는 무지무능한 자기 육신의 생각만을 근거로해 임의로 말하는 자입니다. 또 사람이 만든 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기능이 뛰어나도 사람 이하의 자식권에 속한 도구일 뿐, 결코 사람 이상의 아버지로 존대해 절하거나 복을 빌만한 신이 아니라고 생각는 분은 이치에 합당한 생각을 하는 산 사람이지만, 사람이 만든 기계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능히 하기 때문에 기계들은 사람이 경배해야 할 신적 존재라고 말하는 자들은 자기 자식이 자신보다 부강하게 되면 꿇어 엎드려 절할 자들입니다.

 아버지의 피와 형상을 닮은 자만이 참된 자식이라고 생각는 자는 혈육을 근거로한 고깃덩어리 생각이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자만이 참된 자식이라고 생각는 자는 분수와 도리와 이치를 근거로한 사람의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물려받은 유대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태복음 3:8~9)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목숨까지도 기꺼히 바쳐 순종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신학자들이 인간 육신의 뜻으로 그릇 해석해, 예수님을 다만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로 해석해 그런 권세를 갖고 세상 사람들에게 임의로 행세하며 또 저들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처럼 순종해 지킨 일입니다. 그러나 육적 부강과 평안을 목숨처럼 존중하는 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언행을 목숨처럼 존중하는 신앙인들만은 천국의 풍습과 제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마치 세상 제왕의 자녀들이 나약한 백성들에게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특권 정도로 취급해 믿고, 자신들은 부왕의 뜻인 국법을 마구 거역해도 항상 사면받을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혈통의 순수함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실증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란, 하나님의 능력을 백그라운드 삼아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다른 연약한 사람들이나 피조물들 위에 군림해 만용을 뽐내는 일이 아니라, 어느 피조물보다 창조주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순종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직분자들이 대표기도하는 내용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마구 팔아 처분하였길레 기도할 때마다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지… 마치 부잣집 자녀들이 가난한 자들 앞에 마구 행세하여 공법에 저촉되었을 때마다 자기 아버지께 찾아와 전처럼 뇌물을 사용해 자신을 빼내 달라고 울부짖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 시간이란, 믿음의 용사들이 한주 동안에 세상에 나가 싸위 이긴 전과를 갖고 왕되신 하나님께 찾아와 승전 보고를 드리는 일이지, 세상과 싸워 패망해 쫓겨다닌 일들만 울며 불며 사죄해 달라고 비는 패장들의 단합대회가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 매일 같이 죄악 세상과 싸워 패한다면, 그는 세상과 싸워 이긴 예수님과 동행한 삶이 아니라 여전히 죄의 종 노릇을 하는 옛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짓입니다. 어찌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싸워 패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그 같은 기도는 그들의 선생된 신학자들이 세상 죄악과 싸워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의 종 노릇을 하는 죽은 이스라엘의 불순종한 믿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교회에서 가르치는 건 인간 신학일 뿐, 세상을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은 세상 죄악을 이기게 하는 것이고 신학은 세상 죄악을 수용해 화목하는 것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라디아서 6:17) 하심 같이, 신앙은 세상 죄악과 싸우기 때문에 반드시 피흘린 흔적(고통)이 있지만, 신학은 세상 죄악과 휴전해 화목하기 때문에 피흘린 흔적(고통) 없이 매끈합니다. 세상 죄악과 싸운 예수님의 신앙은 피뿌림의 결과로 부활승천 하셨지만. 세상 죄악과 화목한 신학은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끝내 잔혹한 로마 군병의 말발굽 아래 짓밟힙니다. 신앙은 세상 어느 사람의 말(지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고, 신학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여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맹신으로 취급하고 오직 인간 학문 지식으로 재평가된 성경 지식만 믿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기 42:3) 하심 같이, 동방의 의인 욥 같은 지성인도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생각을 자식된 인간, 곧 욥 스스로의 뜻과 생각으로는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렵다고 회개 자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어느 신앙인이 욥보다 뛰어나다고 자처하여 인간 스스로의 뜻과 생각인 학문 지식을 근거로해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게 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오직 수십년 간의 신학 수업으로 재조명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발 주제넘은 소리들 작작 하십시오.

 지금 이 시대의 뜻 있는 신앙인들이 저마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하나, 그러나 그 개혁의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신학에서 벗어나 신앙으로 거듭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혹 그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이 거대한 신학 조직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로 생각해 주저 앉고 맙니다. 배운 것이 도덕질이라 하듯, 신학을 떠난 신앙은 상상도 못할 자폭 테러행위로 취급해 금합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은 신학에서 비롯된 적화(인간화, 사단화)된 타락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믿음 뿐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만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며,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여야만 사회와 나라의 기강이 바로 잡혀 국태민안에 이르게 될 뿐, 이것이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신앙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바로 잡으려 애 써도 그것은 모래를 뿌리고 알곡을 거두려는 짓과 같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와 사회와 나라는 가히 절망적입니다. 그런데도 신학자들은 자기 죄를 실토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이 자신들의 신학 때문이라는 것을 이렇게 지적해 주어도 이런 지적은 유명 신학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여 믿지 않습니다.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태복음 12:26) 하심 같이, 이런 지적이 신학에서 나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사단이 사단을 단죄해 책망하는 짓과 같습니다.

 신학자들과 목사님들마다 다른 신학자들의 목회자들을 지적해 책망합니다. 그러한 지적과 책망은 자신들과 같은 신학이나 목회방침과 다른 것에 대한 지적이고 책망일 뿐,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실행해 지키지 않고 연구해석만 하는 신학 자체에 대한 지적과 책망이 아닙니다. 즉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성경해석이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성셩말씀을 믿지 않고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교의 신학을 개신교의 신학으로 공격하는 것은 합당치 않으나 구교이든 개신교이든 성경말씀을 곧바로 믿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람의 생각으로 연구해 해석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는 신학 자체를 지적해 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회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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